앞선 연재 기사에서 우리는 가야, 특히 전기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가락국이 로마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의 사회를 이룰 조건을 여러 모로 갖추고 있다는 것을 봤다. 로마는 현재 세계사적으로 화려한 문명으로 손꼽히며 상당히 속속들이 그 역사의 디테일이 전해지고 있다. 반면 가야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20세기 말 토목 공사 등으로 땅 속이 열리면서, 예상 외로 많은 가야 유물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지금은 그 많은 유물들을 계기로 가야사를 다시 봐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공감대가 굳어져가고 있다
“저건?”홈을 살피다가 그것이 굴뚝임을 알 수 있었다. 홈통을 이룬 석회암 표면에 화석처럼 딱딱하게 굳은 그을음이 껍질처럼 벗겨졌다. 쇠를 제련할 때 나오는 철매(鐵媒)였다. 이곳에는 분명히 쇠를 녹이고 합금하던 풀무가 있었을 것이다.…이렇듯 두꺼운 철매층을 남길 만큼 불을 땠다면 어딘가 땅 위로 굴뚝 끝이 닿아 있었을 것이다. 또 종유동이란 게 원래 흐르는 지하수의 용해작용으로 생겨난 굴이고 보면 산 위 어딘가에 빗물이 스며드는 통로가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굴에서 빠져나와 종유동 꼭대기로 추정되는 봉우리 위를 더듬어
가야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가락국(금관가야)을 맹주로 한 전기 가야연맹 지역인 낙동강 및 섬진강 하류 일대에서는 엄청난 양과 고품질의 철 덩이, 무기‧갑옷‧기타 도구 등 철제품들, 그리고 화폐와 도기 등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가야는 당대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물질 문명을 자랑하던 나라였고, 그런 문명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고(高)퀄리티 철을 생산하고 교역하던 능력이었다는 점이 확실해진다.이 많은 철들은 다 어디서 생산된 것일까? 무덤에 그 정도 묻혔다면, 당시 가야 사회에는 훨씬 더 많은 양의 철들이 넘쳐났을 것이다. 그
갑자기 길이 끊어지며 웬 종유동굴 하나가 검은 입을 떡 벌린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 겁도 없이 손전등 하나에 의지하여 컴컴한 어둠을 헤치고 동굴 속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쭈뼛함이 들어 전방을 자세히 살펴보니… 저건 분명 사람의 형상이 아닌가. 가까이 다가서자 인물상은 두 손을 모은 단정한 자세로 뜻하지 않은 외부인을 묵묵히 맞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종유동과 돌기둥은 석회석인데 비해 인물상은 화강암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그 모습은… 그리스 석고상과 비교해도 좋을 만큼 기법이 정교
서기 20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기 가야연맹 종주국인 가락국(금관가야)은 지금까지 다니던 중국 양쯔강 유역과의 관계를 접고 대신 일본으로 활발하게 진출하기 시작한다. 260년 세월 공들였을 땅을 떠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은 분명 쉬운 방향 전환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이 그 변화의 동력이었을까?답부터 말하자면, 그 동력은 비즈니스 제국 가야의 대표 상품인 철제 무기와 농기구 등의 원료인 철을 생산할 수 있는 기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강한 동기였다.이 시리즈에서는 가야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누가 봐도 가야의
가야가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것은 속속 발견되는 유물과 일본의 고(古)기록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가야가 상당 기간 중국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자료의 시기를 살펴보면 가야는 건국 후 200년 이상, 일본보다는 중국과의 교류에 에너지를 집중했던 것 같다. 일본과의 교류 역사는 서기 200년대에 들어서면서, 즉 우한 일대에서 가야의 활동이 중단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가야의 대(對)일본 교류에 대해서는 차차 보기로 하고,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가야는 왜 지도상으로 봤을 때
우한(武漢). 현재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불편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도시다. 하지만 이곳은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특성을 가진 지역 중 하나다.이 글에서 다룰 지역은 우한에서 시작되어 서북 방향으로 펼쳐져 있는 평야지대다. 중국 대륙에서 제일 긴 양쯔강과 5번째로 긴 한수(漢水)가, 서북 산지의 영양물질을 풍부하게 실어 내리면서 합쳐져 이루는 비옥한 땅이다. 바로 이곳이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담겨 있는 일식에 관한 기록을 컴퓨터로 분석,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201년까지의 기록은 실제로
“들을지어다, 파에아키아의 명장, 고관들이여. / 이 손님은 동에서인지 서에서인지 몰라도 / 표류 끝에 이곳에 당도하였소이다. / 이분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으니, / 과거 여느 때처럼 신속히 도움을 주도록 합시다. / 자, 성스러운 바다에 가장 적합한 흑선(黑船)을 띠우고 / 우리 땅에서 가장 우수하다 알려진 청년 / 쉰하고 두 명을 골라봅시다.”전설적인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의 한 구절이다. 무대는 기원전 12세기 지중해. 그리스 이타카 출신의 명장 오디세이가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국 신(新)왕조의 화폐 화천은 묻혀진 한반도 역사의 한 단면을 확실히 보여준다. 가야를 중심으로 상당히 활발한 교역이 일상이었던 때의 모습이다.그 교역 루트는 공간적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최소한 중국 황하 유역과 산둥반도로부터 한반도 서해안의 평양, 광주, 해남을 거치고, 남해안의 사천, 김해, 부산을 거쳐, 일본의 쓰시마, 이키, 규슈까지 이어진다.[image1]이 광대한 루트가 서기 1세기 전반에 이미 안정적으로 정립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선 연재기사 ‘중국 신나라 때 화폐 화천은 어디서 주조됐을까’에서